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내전 (문단 편집) === 참전국에 미친 영향 === 내전 기간 동안 전쟁 양상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스페인은 상술하였듯이 근대전 경험이 부족했다. 내전 초기에는 [[회전#s-3|한 쪽 진영의 군대가 개활지로 뛰쳐나오면 반대측이 이를 맞아 나오면서 교전이 벌어졌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는 커녕 18세기의 전투양상 보다도 별로 나을게 없는 것이었다. 스페인은 1차 대전 때 중립을 지켜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참호의 중요성이 많이 간과 되었고 심지어 몇몇 장교들의 경우에는 참호를 파고 쳐박혀 싸우는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참호 구축을 소홀히 하기도 했다.[* 이는 스페인의 자연환경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돌투성이 산악과 드넓은 황야로 뒤덮인 이베리아 반도는 참호를 구축하기 적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교전마다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누가 따로 시키지 않아도 죽자사자 참호를 파게 됐지만.][* 1차 대전 이전까지 수백년간 전쟁은 기동을 통해 결정지어진다는 것은 전쟁의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동을 통한 승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참호전은 당시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다. 때문에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고서야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도 했다. 1차대전때 서부전선에서도 [[마른 전투]] 이후 교착상태에 빠지기 전까지 참호의 중요성이 간과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훈은 결국 피로 대가를 치르면서 얻어진다.] 하지만 내전 후기 즈음에는 인민전선과 국민전선 양측 모두 화력과 항공기 엄호 아래 기갑부대로 전선을 돌파하여 포위섬멸하는-소위 말해 '''전격전 비스무리한''' 전술을 구사할 만큼 성장했다. 물론 소련과 독일에서 파견한 고문단과 파일럿, 물자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불과 3년만에 급격하게 변화한 전투양상과 스페인인들이 이에 빠르게 적응한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한 경험 축적 덕분에 스페인군이 동부전선에 파견한 [[청색사단]]은 당시 히틀러도 괜찮게 평가한 정예로 취급받았다. 반대 방향으로 공화파 망명객도 독일 점령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초기 활동과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자유 프랑스]] 군에서도 바로 그 파리 입성을 한 정예 기갑사단에 배치되는 등 동기 부여가 확실하고 숙련된 베테랑 취급을 받았다.[* 파리를 해방시키고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가 [[필리프 르클레르]]가 이끄는 프랑스 제2기갑사단 산하 9중대(La Nueve)로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국제여단 의용병으로 참전했던 외국인들도 본국 귀환 이후 자연스럽게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2차대전 당시 각국 연합군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적으로 의심받아 장교 직위는 꿈도 못꾸고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지속적인 시찰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군부대에서는 감투정신이 투철하고 전쟁 초기 소중한 현대 총력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훈련교관, 고참 부사관으로 쓰거나 아예 그 정치성과 영향력을 무기화해서 추축군 점령지 레지스탕스들과의 연계작전에도 중용되었다. [[벌지 전투]] 당시 기계화부대 분대장으로 타고 가던 탱크가 [[라케텐판처뷕세|판처슈렉]]에 맞고 분대원들이 몰상당한 상황에서 기습가한 독일군을 역관광시켜 [[명예 훈장]]을 받은 [[https://en.wikipedia.org/wiki/Edward_A._Carter_Jr.|에드워드 카터 중사]], 종군 경험을 살려 현대 대전기 당시 영국 [[홈가드]] 교관으로서 [[게릴라]]전, 유격전 관련 이론적 체계를 쌓은 [[https://en.wikipedia.org/wiki/Yank_Levy|버트 레비]], 헤밍웨이 소설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의 모델 중 하나로 추정되며 2차대전 때는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에서 배후 침투, [[사보타주]], 레지스탕스와의 연계 임무를 수행한 [[https://en.wikipedia.org/wiki/Irving_Goff|어빙 고프 대위]] 등이 유명한 사례. [[https://en.wikipedia.org/wiki/Albert_Baumler|알버트 바움러]]라는 미국인 공화파 항공의용대 파일럿은 내전 후에도 계속 미군에 남아 2차대전 당시 [[플라잉 타이거즈]]에도 파견되었고 훗날 [[6.25 전쟁]] 때도 미군 소속 항공 관제사로 파견됐는데 어느날 소련군 미그기 통신 감청 임무 중에 소련 파일럿 콜사인을 알아내니 그게 스페인 내전 시절 자기 편대 전우의 콜사인이라 주기적으로 감청하던 소련군 미그기 편대를 "내 전우들"이라고 웃으면서 불렀다는 후덜덜한 일화도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도출된 전훈은 이후 스페인뿐 아니라 2차 대전에서 여러 국가들, 특히 '''독일과 소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이 전쟁에서 [[Ju 87]], [[Hs 123]] [[급강하 폭격기]], [[He 111]], [[Do 17]], [[Bf 109]], [[1호 전차]]와 [[PaK 36]], [[88mm 대공포]] 등 신병기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각 병기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1호 전차]]의 부실함, 전차는 '''적 전차'''를 더 주의해야 한다는 점 등.] 여기서 얻은 실전경험을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데 참고하여 이후 2차 대전에서 보여준 [[기동전]]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소련은 자국의 병기가 그럭저럭 활약하자 자만하여 이 전쟁의 교훈을 군대 개량에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그래도 전차전은 그럭저럭 교훈을 얻었는데 이 시절 전차들은 전차 자체의 성능도 그저 그렇고, 통신 기술이나 운용 교리도 미숙해 집단 운용은 개판이었고 소규모로 보병대에게 붙어 지원해 주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전차 자체도 무장이 대전차전이 아닌 대보병전이나 지원에 좋았다. 이때 소련군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교리에 따라 전차들을 집중편제하고 있었는데 이걸 보고 '이게 아니구나' 싶어 전차사단을 해체하고 보병사단에 부속부대로 붙여준다. 그러다 독일군이 전차를 대규모로 집중 운용하며 연합군을 발라 버리자[* 전차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겹쳤지만.] '아 그때 그렇게 한게 맞구나' 하며 다시 전차들을 집중시켰지만 제대로 되기도 전에 독일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물론 초반부에는 발렸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벌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여기 참가했던 인력을 모조리 날려먹어 그 경험을 잘 활용하지도 못했다. 이 전쟁의 결과에 자만했던 점은 이탈리아도 비슷하다. 일단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문화적으로 유대깊은 형제국가나 진배 없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 어떤 식으로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다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원래부터 스페인 우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 결정 자체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독일은 스페인에서 원료나 확보하고 프랑스를 견제하는 정도 이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은 없었지만 스페인은 만약 이탈리아의 힘이 좀 더 컸다면 이탈리아의 세력권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이탈리아는 독일과 비교하더라도 스페인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 그리고 가능만 했다면 에티오피아 정복 따윈 사소하게 보일 정도의 거대한 무솔리니 정권의 국뽕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스페인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통일 이전 이탈리아 열국들 상대로 줄곳 상국 신세로 군림했고 밀라노는 150년,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는 아예 300년에 걸쳐 통치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반적으로 지방분권 친화적인 통치 방식과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 나라들이 북쪽으론 개신교 북유럽 세력, 남쪽으론 이슬람 세력이란 공적에 맞서 협력해야했던 시대적 문맥, 그리고 종교-문화적 친밀감 때문에 19-20세기를 휩쓸고 파시즘의 토양이 된 이탈리아 급진 민족주의 사관에서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프랑스만큼 증오하진 않았지만 어쨋든 얄미운 옛날 상전국중 하나를 속국비스무리 하여튼 영향권 아래 넣었으면 국뽕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대외 인식상 국력이 최전성기를 달렸을 때는 그 실체가 까발려지지 않았고 히틀러 상대로 맘대로 움직이면 한대 맞는다 으름장놓을 패기까지 있었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상국비스무리한 영향력을 끼쳤던 30년대 초반이었다. 물론 성공한다는 가정 아래...] 문제는 독일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국력에 비추어 스페인에 지나치게 많이 퍼주고 그에 비해 얻은 것은 결과적으로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름 알뜰하게 스페인에서 챙길 거 다 챙기면서 지원해 줬던 독일과 소련과는 달리[* 대표적으로 스탈린은 공화정부 측에 무기 등을 지원할 때마다 공화정부가 보유한 금을 꼬박꼬박 털어먹었다.] 무솔리니는 프랑코에 그냥 마구 퍼줬고 의용군이라는 명목하에 사단 단위로 부대를 스페인에 파견했다. [[흑우|'''소련과 독일도 이러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미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데다가 덤으로 국제연맹의 제재를 받아 경제사정이 영 좋지 않았다.[* 현대 이탈리아야 기술 수준도 우수하고 튼튼한 산업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G7의 일원이라지만 이 시기만 해도 이탈리아는 [[강대국의 최소|메이저 열강에 비해 국력이 낮은 열강 포지션]]을 담당하면서 농업 비중도 높고 기술 수준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고 친다고 해도 산업이 영세한지라 현대 이탈리아와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아무리 숙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쓰러진 상황이라고 해도 누울자리도 안 살펴보고 설칠 입장은 아니었던 셈.]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 내전 개입은 치명적이었다.[* 에티오피아 전쟁 시점에서 이탈리아의 군사비는 '''GDP의 20%''', 예산의 70%를 차지하고 있었고~~[[일본 제국|???:]] 엥? 그거 완전 적정수준 아니냐?~~ 이 마저도 군의 현대화에 투자되기보다는 고위 장성들과 결탁한 군수업자들의 배를 불렸다.] 군의 현대화 작업도 자금난으로 차일피일 미뤄져가는 상황에서 무솔리니가 영국과 프랑스에 ~~또!?~~선전포고를 날렸을 때,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탈리아군은 전혀 전쟁을 치룰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에 되도 않는 오지랖을 부려 개입함으로써 몰락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간 셈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때 독일측에서 좀 이상한 짓을 하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이 남몰래 무기를 공화군에게 팔아먹은 것. 더 막장인 것은 나치 독일과 스페인 공화파 간 무기 밀거래 사이에 소련도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팔아먹은 무기는 구식. 공화정부가 무기를 사는데 경험이 없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사기를 많이 당했다.] 사족으로 이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1차 대전 [[독일 제국군]] 에이스 중 하나로 당시 무기상인이었던 요제프 벨첸스(Josef Veltjens). 이런 무기 밀거래는 한두 번 하다 걸린 게 아니라 1937년 1월부터 내전 내내 계속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거의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었으나 독일은 스페인 광산의 채굴권을 착실하게 뜯어간 것도 나중에 스페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공식적인 중립과는 별개로 18,000명 규모의 지상군인 '청색사단'과 수백명(실전 참가는 수십명)의 조종사를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전선에 파견하고 여러 항구들을 유보트 보급기지로 제공했다. 그나마 이들 의용군 병력은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1944년 초에 스페인 본국으로 귀환했다. 아이러니한게, 이 때 동부전선에 파견된 의용군의 상당수는 구 공화파 인사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이었다. [[연좌제]]를 피하고 수감된 공화파 인사들의 처우와 형기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참전한 것. 물론 이런 점을 악용해서 프랑코 정권이 반강제적으로 자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랑코의 2차대전기의 중립에 대해서는 프랑코의 현명한 줄타기라는 의견이 주류지만 비버는 이에 대해 프랑코의 무리한 요구[* 무기, 물자 이외에 북-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거의 전부를 달라고 했다.]에 히틀러가 질려서 성사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섭이 프랑코의 중립을 위한 의도적인 어깃장이 아니라는 근거로 비버는 프랑코측의 당시 행적에 대해 기술했다. 물론 스페인의 국내적, 국외적 환경도 그 원인 중 하나다. 프랑코의 이러한 꼬장 덕에 그의 정권은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수십년간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엄연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미국과의 협력관계도 구축할 정도로 국제적인 고립도 타파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동시기에 무솔리니의 과욕이 세계 5대 강국의 일원이며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자 1차대전 승전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까지 누리던 이탈리아 왕국을 완전히 파멸시킨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조적이다.[* 국민진영 중에는 반독일, 친영도 있었고 영국이 겉으로는 중립을 표명했어도 그 와중에 추축국급은 아니라도 상당한 지원을 했기 때문에 관계가 유지된 점도 있었다. 당장 프랑코에게 무기는 독일, 이탈리아가 지원해 줬지만 그 무기를 굴리는 석유는 텍사코를 포함한 미국 석유재벌 회사에서 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